💌여신레터 58. 2025 APEC 경주선언, ‘성평등’은 왜 지워졌나

4년 연속 강조됐던 성평등 의제, 2025년 경주선언에선 흔적도 없어

2025.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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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일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21개 회원국 정상들이 채택한 ‘경주 선언’이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2021년부터 4년 연속 강화돼 온 성평등 의제가 올해 처음으로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여성신문이 최근 5년간(2021~2025년) APEC 정상회의 공동 선언을 분석한 결과, 역대 선언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성평등(gender equality)’, ‘젠더(gender)’라는 표현이 올해 경주 선언 전체 25개 항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경제 참여나 권리 신장을 다루는 실질적 내용도 모두 빠졌죠.

APEC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21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경제협력체로, 세계 GDP의 약 60%, 세계 무역의 약 47%를 차지합니다. 이 거대한 경제 블록의 정상들이 합의해 도출한 선언에서 성평등 의제가 사라진 건 단순히 표현 몇 개가 빠진 문제가 아닙니다. 국제 사회가 이 문제들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낸다는 신호로 읽힐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립서비스조차 없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성평등은 경제 발전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성별 임금 격차 해소, 여성의 경제 참여 확대, AI 시대의 젠더 편향 방지는 모두 지속가능한 경제 성장의 핵심 요소들입니다. 4년간 쌓아온 성평등 의제가 단 1년 만에 실종된 이유를 따져보고, 앞으로를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이번 여신레터에서 자세히 살펴봅니다.

📉 경주 선언, 5년 만에 성평등 의제 사라져

경주 선언에서 ‘여성(women)’은 단 한 번 등장.

💬 “우리는 대한민국이 2025년 APEC 장관회의와 해양, 인적자원개발, 교육, 무역, 디지털과 AI, 식량안보, 여성과 경제, 에너지, 중소기업, 보건과 경제, 재무 및 구조개혁 장관회의를 개최한 것에 감사하다.”(24항)

지난 8월 12일 인천 송도에서 열린 ‘2025년 APEC 여성경제회의(WEF)’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회의의 구체적 성과나 합의 내용은 다루지 않고 ‘개최했다’는 사실만 언급했죠.

‘모든 이들’이라는 포괄적 표현으로 대체

💬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모든 이들이(all) 성장과 번영의 기회와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16항)

포괄적 표현만 등장할 뿐, 여성이나 성평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 4년 연속 명시됐던 ‘라 세레나 로드맵’ 공약도 사라져

2019년 칠레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여성의 경제 역량 강화 계획입니다. 2021년부터 2024년까지 4년간 APEC 정상회의 공동 선언에 매년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핵심 의제였죠.

그러나 2025년 경주 선언에선 라 세레나 로드맵 이행 공약이 완전히 빠졌습니다. 여성 경제 참여나 성평등과 관련한 새로운 이니셔티브나 프레임워크도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 AI 이니셔티브는 채택, 여성 참여는 언급 없어

AI와 인구 변화는 다뤘지만, 젠더 관점은 실종

경주 선언 15항은 “우리는 APEC AI 이니셔티브를 승인한다”며 AI의 잠재력을 강조하고 “균형 잡힌 인간 중심 접근”을 언급했습니다. 18항은 인구 변화에 대응하는 ‘APEC 인구 변화 협력 프레임워크’를 승인했습니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AI 기술 발전을 위해 여성의 참여와 리더십을 확대하자거나, 여성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노력이 초저출산 문제 해결의 핵심임을 언급하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외교부는 답변 없어

여성신문은 외교부의 입장을 듣고자 수차례 문의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습니다.

🚨 트럼프 재집권 후 첫 APEC, 의장국의 딜레마?

미국의 반(反) DEI 기조가 영향 미쳤나

APEC 준비 과정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은 “당혹스럽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의장국으로서 회원국 간 합의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민감한 이슈를 우회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 후 반(反) DEI(다양성·형평성·포용) 기조를 내건 미국 등 일부 회원국과 성평등 의제에 대한 입장 차가 컸을 것이란 분석입니다.

미국의 DEI·성평등 정책은 2021년~2024년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도입·확대됐으나, 올해 초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 이후 전면 철회되는 중입니다. 이번 회의는 트럼프 2기 들어 처음으로 열린 APEC 회의였죠.

8월 장관급 회의서도 비슷한 일이

비슷한 기류는 지난 8월 APEC 여성경제회의에서도 포착됐습니다. 여성 분야 장관급 회의로 올해 한국이 처음 의장국을 맡았지만, 당시 강선우 전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낙마하면서 장관 없이 대행 체제로 치러졌죠. 여기에 국제적 우경화 흐름까지 더해져, 의장국이라 해도 성평등 의제를 적극 앞세우기에 조심스러운 환경이었다는 해석입니다.

💬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DEI를 걸고 넘어지지 않았나. 미국 측에서 ‘이런 건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레드라인을 제시해 우리 쪽에서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려했었지만 미국이 (해당) 고위급회의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 결과 여성경제회의 공동성명문에는 젠더(gender), 이퀄리티(equality) 등의 표현이 포함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