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비혼페어’가 이달 초 서울 성수동에서 열렸습니다. 입소문만으로 2000여 명이 다녀갔습니다. 인기 브랜드 팝업도 웨딩페어도 아닌 ‘비혼페어’에 이 정도 인파가 몰리다니. 주최 측인 ‘한국비혼여성연합’도 기대 이상의 호응에 놀랐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엔 ‘철없고 이기적인 여자들’을 헐뜯고 저주하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새롭지 않은 일입니다. 여성에게 주어진 삶의 종착점이 오직 결혼뿐이던 시대가 속절없이 저물어 간다는 사실을 체감할 뿐입니다. 

여성들의 비혼은 도도한 흐름에 가깝습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결혼보다 내 삶에 더 집중하는 여성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이전 세대보다 훨씬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에게 결혼은 삶의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일 뿐입니다. ‘결혼해야 정상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회적 압력도 약해졌습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비참한 말로만이 기다릴 뿐이라는 으름장은 지겹습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나’로서 살 수 있는 자유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됐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채 3040을 맞이하는 ‘비혼 세대’의 출현입니다. 

그런데 비혼의 삶을 불안해하는 여성이 많은 건 왜일까요. 저출생이 ‘국가적 위기’로 떠오르면서 결혼하지 않은 이들을 ‘2등 시민’ 취급하고 어떻게든 결혼 제도 안에 끼워 맞추려는 사회 분위기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겁니다. 여성단체는 1990년대부터 ‘미혼’ 대신 ‘비혼’ 쓰기 운동을 해 왔는데요. 언젠가 결혼할 것이라는 뜻을 담은 ‘아직 미(未)’ 대신 ‘아닐 비(非)’를 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정치적인 선언입니다. 

주위에서 비혼 여성을 보고 자란 경험이 드물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젊은 비혼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고 중·노년이 된 여성을 흔히 만나지도, 그들의 생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합니다. 젊어서야 어떻게든 되겠지만, 나이 들어서도 잘 살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한 여성의 삶을 비혼과 기혼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형태로 읽어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돈이 많지 않아도, 특별하지 않아도, 강하지 않아도 비혼으로 잘살 수 있는 세상. 결혼을 택하지 않더라도 차별이나 제약에 부딪히지 않는 세상을 원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비혼페어는 내년에도 열릴 예정입니다. “흔히들 비혼 여성을 두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무책임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 주변 비혼 여성들과 비혼 여성 공동체는 우리가 성공해서 얻게 될 수익을 청소년과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환원할지 고민합니다.” 문영원 한국비혼여성연합 대표의 말들을 통해 한국사회 비혼의 현주소와 비혼 여성들이 나아갈 길을 고민해 봅니다.

비혼페어는 올해 3월 출범한 한국비혼여성연합이 주최했습니다. 당초 예상 최대 입장객은 1800명이었는데, 오전 11시 개장 전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더니 예상을 훌쩍 넘긴 2천여 명이 행사장을 찾았습니다.

성수동 어브 스튜디오 1~2층에는 66곳의 기업과 단체 부스가, 3층에서는 생활경제와 여성 건강권 등 비혼 여성을 위한 강연과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강연장 120석이 모자라 많은 참가자가 바닥에 앉거나 서서 강연을 들었습니다. 행사 수익금 일부는 서울시가 폐지를 시도했던 여성청소년건강지원단 나는봄에 기부됩니다.

현장을 찾은 여성들의 반응도 뜨거웠습니다.

💬 “여성 기술자 관련 부스가 인상적이었다. 남성 기사를 부르는 것이 불편해 에어컨 수리를 여성 기사에게 맡기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그런 서비스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성남시에서 온 30대 여성)

💬 “여성들이 모여 한 공간을 점유하는 경험을 할 수 있어 의미 있었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었다.” (고양시에서 온 30대 여성)

💬 “비혼은 결핍이나 고립이 아니다. 비혼은 주체적인 삶에 대한 여성의 선택이자 여성 혼자서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끔 사회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운동이다.” (문영원 대표, 개막식에서)

💬 “현재 우리 사회는 여성을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비혼을 주제로 축제 분위기의 행사가 열려 의미가 있다. 더 많은 정치인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박진숙 여성의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왜 여성만 입장 가능했나

“비혼 남성도 입장을 허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는데요.

💬 “비혼 여성과 남성이 함께 모일 경우 ‘선자리 행사’처럼 보일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또 저희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악성 메시지를 보내거나 관련 기사에 악플이 많이 달렸고, 남초 사이트에도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참여자분들의 신상 보호와 안전에 신경을 쓰다 보니 여성의 출입만 허용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문영원 대표)

💬 “여성과 남성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다르다. 여성은 가부장제 거부, 남성은 경제적인 이유가 크다. 비혼이라는 공통된 선택만으로 여성과 남성을 동일한 집단으로 묶는 것은 무리가 있다.” (비혼페어 MC를 맡은 문파란 작가)

💬 “비혼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정보를 얻고, 참고할 수 있는 롤모델이나 여러 사례를 한눈에 모아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또 비혼 여성은 아직까지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조명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혼 여성이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비혼 여성의 삶도 즐겁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왜 비혼을 택하는 젊은 여성이 늘어나는 걸까요.

💬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고 사회 진출 욕구도 커졌다. 하지만 한국에서 결혼하면 받는 불이익이 크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혼으로 기울게 된다. 또 교제폭력과 가정폭력 등 여성폭력, 여성혐오가 심각한 수준이라 이성과의 관계에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비혼 여성을 위한 정책 과제도 제시했습니다.

💬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성별 임금격차가 최고 수준이다. 임금차별을 겪고 있는데 안전을 위해 지출해야 하는 비용마저 너무 크다. 혼자 사는 여성은 범죄의 타깃이 될 수 있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에서 살기 위해 높은 월세와 여러 안전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주거와 안전, 경제적 측면에서 더 많은 복지가 필요하다.”

한국비혼여성연합은 생활동반자법 제정, 여성의 생존권·경제·노동권·정치 참여권 등 의제를 논의하며 비혼 여성의 세력화를 도모할 계획입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10주기를 앞두고 추모 활동, 매년 정기적 비혼페어 추진 계획도 전했습니다. 앞으로 기성 여성단체와도 협력해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모색하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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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비혼페어추진위원회, 김세원 기자, 손상민 사진기자
• 이번 ‘여신레터’는 김세원 기자가 쓴 기사를 기초로 이세아 기자가 제작했습니다.
• “결혼 안 해도 괜찮아”…‘비혼페어’에 여성 2천여명 몰렸다
• “비혼여성이 이기적이라고요?…청소년·다음 세대 위해 고민합니다”
• 앞으로도 최신 젠더 이슈와 관련된 여성신문만의 다채로운 콘텐츠를 전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피드백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