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내려 돌아온다.”

미국 체조 대표팀 주치의 성폭력 생존자, 카일 스티븐스가 2018년 재판에서 한 말입니다. 2025년 9월 10일, 한국 여성 운동사에 기록될 만한 중요한 판결을 보며 다시 그 말을 떠올렸습니다. 최말자 씨가 61년 만에 무죄를 인정받은 날이었습니다.

성폭력 가해자에게 저항하다가 다치게 했다는 이유로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여성.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한 죄를 가해자에게 묻기는커녕, ‘정조를 지킬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고 벌했던 시대의 산증인.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싸워 승리한 여성.

이번 판결은 억울하게 고통받은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가 재심으로 인정된 첫 사례입니다. 성폭력에 대한 한국 사법부의 낡은 인식을 깨는 중요한 판례이기도 하지요. 비록 사법부의 잘못으로 억울하게 죄인으로 살았던 날들에 대한 사과는 없었지만, 향후 다른 사건 재판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한국 사회는 최씨에게 정말 큰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그 야만의 시대는 정말로 지나갔나요. 민주진보 진영을 표방하는 정치인들부터 우리 곁의 10대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가 얼마나 손쉽게 일어나는지를 우리는 2025년 9월 현재에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얼마나 절박하게 저항했는지, 얼마나 ‘피해자다웠는지’를 증명해야 했던 시대로부터도 우리는 그리 멀어지지 못했습니다. 주요 선진국은 물론 일본도 도입한 ‘비동의 강간죄’는 여전히 먼 과제입니다. 그나마 원민경 여성가족부 장관이 청문회에서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공개적으로 밝힌 데에서 희망을 봅니다. 

변화의 시작은 기록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18세 소녀가 어떻게 ‘가해자’ 취급을 받게 됐는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상이 된 사회가 피해자의 고통에 얼마나 무감각해질 수 있는지 되짚어보겠습니다. 한 여성의 용기가 어떻게 다른 여성들과 만나 희망의 등불로 타올랐는지도요. 

18세 소녀는 어떻게 ‘가해자’가 되었나

 

1964년 5월 6일 오후 8시경, 경남 김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만 18세였던 최씨는 ‘길을 모르겠다’면서 접근한 가해자 노모(당시 21세) 씨에게 길을 알려주다가 성폭력을 겪었습니다. 가해자가 최씨의 어깨를 잡고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강제로 입 맞추려 한 겁니다. 저항하던 최씨가 가해자의 혀를 깨물어 1.5cm가량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누가 봐도 정당방위였지만, 사법부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최씨는 중상해죄로 기소돼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반면 가해자는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았습니다. 강간미수 혐의는 아예 적용되지도 않았습니다.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사법기관이 오히려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 겁니다. 검찰과 재판부는 최씨에게 “결혼해라”, “합의해라” 등 2차 가해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56년 만의 각성, 5년간의 투쟁

 

최씨가 자신의 억울함을 바로잡기 위해 나선 건 2020년, 사건 발생 56년 만이었습니다. 60세가 넘어 입학한 방송통신대학교에서 ‘성, 사랑, 사회’ 수업을 들으며 과거를 돌아본 일이 계기가 됐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미투 운동도 용기를 줬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2021년 첫 재심 청구는 기각됐지만, 최씨는 포기하지 않고 대법원에 재항고했습니다. 2024년 12월 대법원이 원심을 파기환송하면서 재심의 길이 열렸고, 2025년 2월 부산고등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했습니다.

 

9월 10일, 18세 소녀였던 최씨는 79세가 되어서야 ‘무죄’라는 두 글자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날 부산지방법원 형사합의5부(부장판사 김현순)는 최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피고인의 행위는 정당방위로 인정돼 상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재심으로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가 인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법정 안은 여성단체 관계자들과 시민들의 박수와 환호로 가득 찼습니다. 법원 앞에서는 ‘최말자가 해냈다’, ‘정당방위 인정’, ‘61년 만에 재심으로 성폭력 정당방위 인정’이라는 플래카드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습니다.

 

최씨는 무죄 선고 직후 기자회견에서 “61년 전, 18세 소녀였던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었다”며 “주위에서 바위에 계란 치기라고 만류했지만, 이 사건을 묻고 갈 수가 없었다.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피해자들을 위해 앞장설 수밖에 없었고, 그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검찰은 사과했지만, 재판부는...

 

다만 재판부가 좀 더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줬어야 하지 않느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선고까지 약 1분밖에 소요되지 않았고, 사법부의 과거 오판에 대한 사과도 없었습니다. 

앞서 지난 7월 재심 공판 때 이례적으로 정명원 공판부 부장검사가 직접 법정에 나와 “성폭력 피해자로서 마땅히 보호받았어야 했을 최말자님께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드렸다. 깊이 사죄드린다”고 공식 사과했던 것과도 대비됩니다. 최씨도 “시원섭섭하다. 해명을 하던지, 사과를 했어야 했는데 말도 없이 몇 마디로 무죄를 선고했다”며 서운함을 내비쳤습니다.

 

최씨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최씨의 변호를 맡은 김수정 변호사는 “국가기관에 의해 당한 위법한 행위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과 형사보상 청구를 진행해 선생님께서 당했던 피해에 대해 국가가 져야 할 책임을 추궁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여성폭력 피해자의 정당한 방위행위조차 폭행으로 인지하는 관행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고도 강조했습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지난 8월 4일자 여성신문 칼럼에서 이번 판결의 역사적 맥락을 짚은 바 있습니다.

 

“1988년, 1964년과 똑 닮은 사건이 발생하고 피해자가 구속되고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 여성의전화와 대구 지역 여성단체 회원들, 대학생들이 “강간범 혀 깨문 ○여인의 행위는 정당방위이다, 무죄를 선고하라”며 안동 법원으로 몰려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때 그 사건이 최종적으로 무죄가 안 되었다면 어땠을까.

수많은 여성들이 본인의 피해를 드러내고, 고소하고,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 받고, 그래도 또 말하고, 고소하고를 반복하는 일이 없었다면, 성폭력 피해경험에 대한 말하기가 일 년 내내 들불처럼 퍼져나갔던 2018년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를 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내 사건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일어선 최말자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

배은하 부산여성의전화 성·가정폭력상담센터 소장은 10일 선고공판 후 기자회견에서 “여성폭력 현장은 여전히 한 방울, 한 방울의 물방울이 바위를 뚫어야 하는 현실”이라며 “선생님이 보여주신 열정을 절대 잊지 않고, 끝까지 싸워 여성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겠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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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신레터’는 김세원 기자, 손상민 사진기자가 쓴 기사를 바탕으로 이세아 기자가 제작했습니다.

• 사진과 인포그래픽 : 손상민 사진기자, 심숙연 디자이너
• 앞으로도 최신 젠더 이슈와 관련된 여성신문만의 다채로운 콘텐츠를 전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피드백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