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테사 엔슬러는 영국 노동계층 출신 엘리트. ‘돈도 빽도 없는’ 테사의 전략은 무조건 이기는 것. 버티고 발버둥 쳐 사립학교와 법관 가문 출신 동기들을 제치고 잘나가는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성범죄자들도 변호했죠. 피해자들을 집요하게 몰아붙여 무죄를 받아내곤, 변호사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합리화했습니다.

동료와 데이트 중 성폭행을 당하면서 그 믿음은 무너집니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경찰에, 검찰에, 사법부에 정의를 호소하지만, 그토록 헌신했던 사법 체계는 테사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피해자들에게 던졌던 질문들이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을 갈기갈기 찢습니다. 너도 좋았던 거 아니야? 제대로 기억해? 너 ‘꽃뱀’ 아니야?

테사는 무력한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 다른 테사들을 위해” 싸웁니다. 폭력적 구조의 온순한 구성원으로 살아온 자신도 ‘구조적 가해자’였음을 인정하는 용기에서부터 그 싸움은 시작됩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말을 조각내어 물어뜯는 법정에서 테사는 결국 패배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패배는 젊고 똑똑한 한 여성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힘이 됐음을 극은 포착합니다. 재판에선 졌으나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닐 권리에 관한 한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테사는 돈 되는 의뢰인만이 아니라 자신을 닮은 여성들, 자신이 지키고 싶은 여성들 옆에 설 겁니다. 그렇게 ‘프리마 파시’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설득해 냅니다.

지난 23일 만난 김신록 배우는 ‘프리마 파시’가 “폭력과 피해와 생존과 희망을 섣불리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법정투쟁에 나서면서 “자발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 안으로 걸어 들어가 그 순간을 다시 체험하는” 주인공의 여정은 단순 성폭행 재현이 아닌 ‘증언’의 과정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내가 겪은 일을 내 언어로 말하는 힘을 갖는 게 회복의 시작일 수 있지요.”

“그래서 관객의 박수는 꼭 무대를 향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 시간을 함께 헤쳐나간 ‘우리’에 대한 박수, 격려이고 응원이고 공감이며, 자기 자신한테 보내는 박수”란 겁니다.

2019년 영국 배경 작품을 2025년 한국으로 불러왔죠. “너무 양극화돼 서로 손가락질하고 혐오하는 것이 너무나 쉬워진 사회”, “손가락질만으로는 어떤 이해나 화해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절박하게 체감하는 시대”에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 깊었다고 했습니다.

2025년 한국 무대에 처음 등장한 ‘프리마 파시’는 “손가락질을 넘어 어디로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우리가 꿈꿔야 하는 것은 더 격렬한 손가락질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세계인 것 같아요.”

연극 ‘프리마 파시’는 오는 11월 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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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신레터’는 이세아 기자가 쓴 기사를 바탕으로 이세아 기자가 제작했습니다.

• 사진 : 쇼노트, 저스트엔터테인먼트
• 앞으로도 최신 젠더 이슈와 관련된 여성신문만의 다채로운 콘텐츠를 전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피드백을 기다립니다.